만 27세가 되는 해 처음으로 정신과에 내원하고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이 해와 이 시기가 유독 힘들어서라기보다는 쌓이고 쌓여 지금 상태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정신과 내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신과에 내원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나랑 비슷한 정도의 증상이 있는 독일 유학생 블로거가 내원하는 글을 보게 되어서이다. `이 정도면 내원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구나, 진단과 처방이 도움이 되는구나.` 싶었다.
정신과에 내원한다고 하거나 불안장애, 우울증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독일 유학이나 박사과정을 그만두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할 것 같다. 나 스스로도 그런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럼 어디부터 잘라내고 다시 시작해야 나아질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었을까? 원인을 따져보자면 장기적으로 만들어진 자기 파괴적이고 수동적인 생존전략과 대학원이라는 특수한 업무 환경, 해외 유학과 전염병으로 인한 고립, 멀어진 친구 관계, 망가진 몸 상태로 스트레스 해소가 불가능해지는 등 여러 일이 내 몸을 무대로 한데 모여 오케스트라를 완성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박사과정을 그만둔다고 해도 여전히 합주는 계속될 테고, 새로운 악기가 추가되어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라 생각한다. 항우울제 복용은 그 원인을 제거해주지는 않지만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처럼 파괴적인 앙상블을 듣지 않도록 방어막을 만들어주고, 한둘씩 차근차근 연주자들을 쫓아낼(?) 수 있게 보조해주는 것 같다. 때로는 내가 담을 수 있는 전기용량을 넘어선 전압이 걸리고 찌릿한 전하들이 우르르 흘러들어오면 과부하로 완전히 망가지고 끝이 나버릴 것 같아서 항우울제라는 저항을 직렬로 연결해 전압강하를 만들어준 것이다. 천천히 충전되고 방전하는 순환을 만들 수 있도록.
여러 원인 중에 내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반적인 문제해결 방식과 생존전략이었다. 어떻게 자기 파괴적이고 수동적이었냐면, 나는 나의 편안과 즐거움을 위해서 생산적인 활동의 양을 줄이고 싶음을 인정하지 못했고, 몸이 망가지고 더는 노력할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습관적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내가 졸리고 피곤하니까 인제 그만 자야겠다"가 아니라 잠을 안 자고는 못 버틸 때까지 그럴싸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속 공격해서 방어적으로 만들어서 평소에는 갖지 못했던 자기방어를 얻어내는 것이다. 몸이 아프면 "나는 쉴 수밖에 없었다.", "할 만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보고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거야?"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몰아세우면서 사실 얻은 것도 많다. 여태껏 그렇게 공부나 운동 등을 수행해왔고 유명 대학의 학위와 엘리트로서 특권, 운동신경 등 목표하던 것을 성취하기도 했다. 고통은 일시적으로 참으면 지나가는 것이고 성취는 영원한 업적으로 쌓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20대 후반에 이르러보니 사실 유한한 내 몸과 정신적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얻어왔던 것이었고 성취한 것들도 유효기간이 있어 점점 옅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력과 면역기능이 점점 약해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운동도 예전만큼 못하게 되니까 점점 업무수행 능력도 떨어졌다.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해야만 스스로 휴식할 면죄부를 발부했는데 면죄부도 자주 발행이 안 되니까 귀해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간보다 압박감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만 길어져 갔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회복도 회복이지만 나의 의지로 선택하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그동안은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도전할까 포기할까?`를 고민하고 내 능력과 한계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했다면, 이제는 내 능력의 정도를 알고 그 정도를 넘어서려면 무엇을 감수하고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하는지 알게 되어서 `어느 정도 비용을 치르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할까?`를 결정해야 하는 단계가 되었다. 높은 곳을 노리고 하는 도전은 아름답기도 하고 할 가치가 있지만, 객관적 지표로 누군가를 앞서거나 여럿에게 인정받으려 과속하게 만든다. 과속의 결과로 도전에 성공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만큼 짜릿한 일이 없다. 그 짜릿함에 중독이 되고 취하곤 했다. 성공할 때는 그 쾌감을 안고 안전하게 감속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한계는 있고 그 한계에 가까운 곳에 다다르면 전보다 자주 실패하게 되는데, 그때는 과열이 되고 고장이 난다. 어디에 처박히고 부서지거나 낭떠러지로 나가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이제는 적정 속도를 정하고 유지할 단계 같다. 그래야 과열되지 않을 수 있고, 내 능력과 노력 탓을 덜 하고 열패감과 자책감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덜 미워하고 더 아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뛰어나기만 바라고 좇아왔는데 누구보다는 모자라기도 한 내 능력의 정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목표와 생산활동의 정도를 정하고, 그 정도가 넘어가면 온전히 자신을 위해 휴식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려 한다.
누가 읽을 진 몰라도 내가 읽었던 그 블로거의 글처럼 이 글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 용기가 되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것들을 원하고 <독일 유학>, <대학원>, <불안>, <우울증>, <독일 정신과> 등을 키워드로 검색을 하고 그 블로거의 글을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나도 마냥 행복해 보이고 때론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쿰쿰하고 너덜너덜한 부분도 있다. 어릴 적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많은 어른을 보면 나도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싶었다. 그 사람들은 지금 너무나 말끔하고 대단해 보이는데, 과연 나처럼 비루하고 보잘것없었던 시절이 있었을까? 이런 환경을 나도 벗어나고 바꿀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다. 픽션 속 역경을 극복하는 캐릭터나 미디어에서 구조받는 사람들을 보면 배가 아팠다. 나는 계속 제자리인데 나만 두고 그들만 탈출해서. 이 글이 현실에 치여 정말 생존을 위해 계속 도전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로 박탈감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해도 될만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종이 바닥이 찢어질까 봐 유리 천장이 가둬버릴까 봐 쫓기고 쫓느라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자원이 쌓여 내려놓고 나를 살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탈감이나 소외감보다는 긴 달리기 후에는 이렇게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오기도 한다는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 내 지인들이 읽는다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 대신 어떤 선택을 내리고 이 상황에서 꺼내려 개입하기보다는 내게 찾아온 이 시기를 스스로 잘 헤쳐 나가기를 지켜보고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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